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↑↑ 전북도, 임실군 주암서원 최덕지 영정 유형문화재 지정 예고 |
가로 67.5cm, 세로 120.6cm의 `주암서원 최덕지 영정`은 보물 제 594호 `최덕지 영정 및 유지초본`을 모본으로 1774년에 모사(模寫)된 것이다.
연촌 최덕지 선생은 본관은 전주, 자는 가구(可久), 호(號)는 연촌(烟村)·우수(迂叟)·존양(存養), 시호는 문숙(文肅)이다.
월당 최담의 아들로 최광지, 최득지, 최직지 등이 모두 그의 형제이다.
1405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였고, 감찰 등 삼사의 청요직을 거쳐 김제군수, 남원부사 등을 지냈다.
관직에서 물러나 전남 영암의 영보촌에 퇴거하여 존양루(存養樓)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고, 1450년 예문관 직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고 영보촌으로 돌아갔다.
`주암서원 최덕지 영정`은 ˝주암사우(舟巖祠宇) 봉안추록(奉安追錄)˝을 통해서 영정의 모사 시기를 알 수 있으며, 고려 말 공복(公服)에 해당되며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대부 초상에서 보이는 독서하는 선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.
`주암서원 최덕지 영정`의 모본인 보물 제 594호 `최덕지 영정 및 유지초본`은 1452년에 왕명에 의해 도사(圖寫)된 것이다.
이후 1630년, 1713년, 1769년, 1774년, 1900년대에 각각 모사되었기 때문에 각 시기별 화법(畫法)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.
한편 `주암서원 최덕지 영정`이 봉안되어 있는 주암서원(舟巖書院)에는 연촌 최덕지, 암계 최연손, 율계 장급, 사촌 장경세 선생이 배향되어 있는데, 1984년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‧관리되고 있는 곳이다.
1774년 당시‘선조 연촌부군 영정 봉안서’를 쓴 최처익은‘여러 문중 사람들과 함께 (영정을) 모사하여 봉안하자는 논의를 하였고, 재물을 조금씩 모아서 6년 만에 영정을 모실 곳을 마련하게 되었다’라고 기록함으로써 당초 주암서원이 최덕지 영정을 모시기 위한 영당(影堂)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.